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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파이어족

by 과객님 2024. 2. 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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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중반쯤이었겠다.

 

IT 버블이 꺼지면서 다양한 회사들이 M&A를 하거나 외국 자본에 넘어가는 경우가 빈번했다. 필자의 회사도 예외가 되지 못했고, 미국 회사로 지분의 대부분이 넘어가 버렸다.

주요 임원들은 미국인으로 교체가 되었고, 보고서와 이메일들은 영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전자결재 폼은 모두 변경이 되었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거구의 외국인은 순박한 미소를 지으면서 헬로 헬로를 연발했다. 신선한 분위기였다.

많은 직원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이탈하기 시작했다. 경쟁회사로 옮기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그룹도 있었고, 해외로 유학을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필자의 경우, 지방대라는 학벌로 경쟁회사에서 받아주기는 만무했다. 스킬과 자격증이 풍부하지 못해서 어필하기도 부족했다. 해외 유학은커녕 새로운 사업도 언감생심이다. 그냥 버티기로 했다. 선택의 옵션이 많지 않았다.


미국 본사의 감사 팀원을 만나다

회사를 인수했으므로, 미국 본사에서 온 감사팀이 한 달여간 머물게 되었다. 재무 현황 분석을 주로 하며, 경영 상태도 함께 확인하기 위함이 목적이다. 대략 10명 정도의 팀원들이 왔고, 사무실에서 간간이 눈에 띄었다. 그런가 보다 했다.

영어를 특출나게 잘하는 직원들이 각자 맡은 팀에서 통역 역할을 했고, 그 직원들을 통해서 자료가 오고 가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부딪힐 일은 크게 없었다. 필요하다고 하는 자료들만 넘겨주면 되었다. 문제가 터진 날은 유난히 날씨가 따뜻했던 맑은 날 늦은 점심시간이었다.

그날따라 점심을 일찍 먹고 들어온 나는 직장인들의 일반적인 루틴대로 정보의 바다를 돌아다니며, 쉬는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가 어두워지면서, 스미스라고 하자. 스미스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머라 머라고 했다. 깜짝 놀랐다.

내가 당황해하고 있으면 돌아갈 법도 한데, 의지가 강했다. 계속 물어봤다. 난 계속 당황했다. 자꾸 들으니 무슨 다큐먼트를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어설픈 영어로 좀 있다가 주면 안 되겠냐?라고 했더니 안된단다. 지금 달란다. 줄 수가 없는데, 무슨 다큐먼트인지 내가 못 알아듣잖니?

도움의 눈빛을 옆 사람들에게 보냈다. 명문대를 나온 사람, 영문학과를 졸업한 사람, 자칭 엘리트인 건너편 친구에게도 눈치를 줬는데 아무도 내 의중을 읽지 못했던 듯하다. 심지어 몇 명은 자리를 피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까지 하더라. 땀이 삐질삐질 났다. 그러기를 약 5분.

5분이 무슨 50분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와중에 통역을 담당하는 직원이 식사 후 자리로 도착했고, 나는 그 무서운 영어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살았다. 그분에게 요청한 문서를 전달한 후 다리에 힘이 다 빠지더라. 그 상태로 오후를 맥없이 보냈다. 오후 내내 부끄러웠고 허탈했다.


영어학원 초보반 등록

퇴근하면서 삼성역 앞에 있는 영어학원을 무작정 찾아갔다. 완전 초급반을 등록했고, 오늘부터 바로 수업을 듣겠다고 했다. 떠듬떠듬 영어 회화를 시작했다. 인생 첫 영어학원이다.

그 후 영어학원은 저녁 스케줄의 대부분이 되어 버렸고, 근무지가 옮겨지게 되면 그 근처에 학원을 알아보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처음에 갔던 삼성동 000학원부터, 종로에 유명한 영어학원, 영등포에 이어 목동에 00학원까지 등등 다양한 곳에서 나의 떠듬떠듬 영어 실력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학원은 여의도와 일산에 1:1 영어학원으로 기억한다. 비싼 만큼 50분 내내 떠들어야 하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나의 개인 이야기를 알려주어야 했다. 재미있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고, 보람차기도 했다.

영어의 장점은 크게 3가지로 생각한다.

1) 글로벌 회사에서 살아남기에 가장 중요한 무기다.

2) 전 세계 방대한 자료의 대부분이 영어다. 지식 습득에 능하다.

3) 만약 –이라면 등을 통해서 생각하지 못했던 주제를 고민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1번이 급해서 시작한 영어이다. 실제로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로 인해 그 회사에서 오랜 기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영어의 반전

 

시간이 지난 후에는 3번이 정말 뜻하지 않게 개인적으로 큰 변화를 주었다. 인생에 긍정적인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다. 예를 들면, “일주일 뒤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너는 무엇을 하면서 남은 시간을 보낼 거냐?”라는 질문이 있었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랬듯이 당황한다. 나도 그랬다. 지구가 멸망하다니? 갑자기 왜? 무엇을 해야 하지? 크게 할 것이 없는데? 회사를 나와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지? 등등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만 간다. 몇 년 동안 나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대답이 완성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을 잔뜩 빌린 후 볼 것이고, 가족들과 못다 한 얘기를 나눌 것이며, 그동안 식사는 신라면만 먹을 것이다. 운동은 절대 안 한다”였다. 심플했다. 정말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영어의 긍정적인 순기능이다.

70살 먹은 할아버지가 60살 먹은 동생에게 더 늦기 전에 영어 공부하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공감한다. 영어를 하게 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꼭 능숙하지 않아도 된다. 

 

“일주일 뒤에 지구가 멸망하면 넌 무엇을 할 거니?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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